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경과 ==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 >"가해자들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내가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 씩 나를 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나를 감금한 장소 창문을 미리 신문지로 다 가려놨더라.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 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못 이겨 내 군대시절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말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다. 이틀간 식사도 못했다. 풀려나기 직전에야 빵을 주더라. 당연히 먹지도 못했다. 병원에서도 한동안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 >"사건 발생 후 각 대학에 피해자들이 오히려 잘못한 것처럼 대자보가 붙더라. 당시 저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서울대 법대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모 교수님에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붙잡혔다. 가해자들에게 그 교수님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교수님이 내 신분을 확인해줬는데도 믿지 않고 폭행을 계속했다." >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이후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 보안원, 경비원 등으로 근무했다. 올해 만 64세인데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다. 다 그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당한 일이라 후유증이 컸다. 사건 이후로도 제가 실제 프락치라는 음해를 계속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피해자 중에는 현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 있다." > >"나는 당시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눈을 가린 채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시민|유 이사장]]은 피해자 소지품을 뒤져 신분을 확인하는 등 직접 프락치 색출작업을 했다. [[유시민|유 이사장]]은 피해자들을 신문하면서 '계속 다른 말을 하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등 협박성 발언도 했다. 가해자들은 [[유시민|유 이사장]] 앞에서 피해자들을 폭행했다. [[유시민|유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피해자 4명 중 가장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전두환을 미워하지 않았나. 내가 [[전두환]]과 같은 전 씨라고 심하게 폭행했다. 정말 미개한 사고방식이었다." > >"지난 1997년 [[유시민|유 이사장]]이 자기 책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써서 소송을 걸었다. 피해자들은 프락치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이다.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시민|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시민|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시민|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 커녕 아는 체도 안하더라." >---- >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의 2019년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910156393H|증언]]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10050032921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0-05&officeId=00032&pageNo=11&printNo=12008&publishType=00020|#]]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1005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0-05&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008&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4. 10. 5. 10-11면) [[파일:매일경제_심재철_서울대프락치결백.jpg]] 피해자 4명은 각각 2일~6일간[* 흔히 11일 동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건이 발생한 총 기간이 11일인 것이고 한번에 4명이 동시에 감금된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붙잡혀 감금되었다.] [[감금]]되어 각목으로 구타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다. 피해자 4인 각각의 피해 기간 및 피해 내용에 대한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823|뉴스타운]]의 기사가 있다.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인 손현구는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이 프락치라고 말했으나 나머지 3명은 끝까지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라며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과 법원은 피해자 4명이 프락치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1/19/2006011970162.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